생전의 알베르 카뮈

내가 청년 시절 참으로 되고 싶었던 작가를 하나 꼽자면 그것은 바로 알베르 카뮈다. 작년이 그의 탄생 백주기가 되는 해였다. 카뮈가 세상에 나온 이듬해에 1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아버지는 그가 한 살이 되기도 전에 그 전쟁에서 죽었다. 그는 애비도 없는 빈민가 출신이고, 가까스로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청년기에 폐결핵으로 인해 죽을 고비를 넘겼다.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레지스탕스에 투신하고, 사형 제도에 반대했다. 첫 번째 아내는 마약 중독이었고, 두 번째 아내는 신경쇠약으로 자살기도를 했다.
그는 장애로 가득한 삶, 불운과 불행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내 생애에서 유일하게 노력한 것 : 정상적인 인간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적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삶과 고투(苦鬪)하며 지중해인 특유의 긍정과 낙관으로 그것들을 넘어섰다. 『이방인』이란 소설로 명성을 얻었고, 이른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3시 55분, 시계는 멈추고

1960년 1월 4일, 월요일 오후, 루르마랭에서 파리로 가는 5번 국도 빌블르뱅에서 승용차 한 대가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춰 서 있었다. 운전자는 프랑스의 유명한 출판사 사장이던 미셸 갈리마르였다. 그 차에는 아내와 딸, 그들의 개, 그와 절친했던 친구가 타고 있었다. 그 사고로 운전자의 옆자리에 동승했던 사람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자동차 계기판의 시계는 13시 55분에 멈춰 있었다. 미셸은 중상을 입은 채 병원에 실려 갔는데, 닷새 뒤에 숨을 거뒀다. 아내와 딸은 무사했지만, 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 사고로 죽은 이가 그 유명한 작가 알베르 카뮈다.
남편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틀 전 아비뇽 역에서 기차 편으로 파리에 올라온 아내 프랑신이 달려왔다. 카뮈는 이마를 가로지르는 상처, 왼쪽 손등에 긁힌 자국이 있을 뿐, 마치 잠든 것처럼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실은 카뮈는 목과 척추가 부러진 상태였고, 그 충격으로 현장에서 즉사했다. 어쨌든 그 자동차 사고로 카뮈는 불과 47세의 나이로 이 세상과 영원히 작별한다.
카뮈는 1913년 11월 7일 새벽 2시,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서 동쪽으로 420여 킬로미터 떨어진 콩스탕틴 현 몬도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뤼시앵 카뮈는 프랑스 본토인 보로도 출신으로, 19세기 말엽에 알제리로 이주한 포도농장의 관리인이었고, 어머니 카트린 생테스는 스페인의 미노르카 출신이었다. 프랑스 이민자 가정의 두 번째 아들인 카뮈가 태어난 이듬해에 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나는 내 또래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1차 세계 대전의 북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우리의 역사는 그때 이후로 끊임없이 살인과 부정, 또는 폭력의 연속이었다.”(『여름』 중 「수수께끼」)

기사 이미지

프랑스의 빌블르뱅 근처 작은 마을에 세워진 카뮈 기념탑

아버지 뤼시앵은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 보고를 하자 보병으로 징집되었다. 10월 11일 마른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곧 사망했다. 어린 카뮈가 아버지와 함께 이 세상에 숨쉰 것은 고작해야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카뮈의 어머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알제의 벨쿠르라는 서민 지역의 친정어머니 집으로 이사를 했다. 외삼촌은 통 제조공장의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파출부와 세탁부 일을 했다. 어머니는 읽고 쓸 줄을 몰랐고, 벙어리로 오해될 만큼 말이 없었고, 잘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표정 변화도 거의 없어 무뚝뚝하게 보였다.
카뮈는 어렸을 때의 어머니의 기이한 침묵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다. “아직도 소년이 기억하고 있는 그 저녁나절들처럼 그녀가 고된 노동에서 돌아와 보면(그 여자는 남의 집 가정부였다) 집이 텅 비어 있는 때가 가끔 있다. 할머니는 볼일을 보러 나갔고, 아이들은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의자에 주저앉아 멍한 눈길로 마룻바닥 틈새를 정신없이 들여다본다. 주위의 어둠이 짙어가고 그 속에서 그녀의 침묵은 위안 받을 길 없는 서글픔에 젖어든다. 옆에 아무도 없으니 그걸 알아줄 사람도 없다.”(『젊은 시절의 글』 중 「가난한 동네의 목소리들」) 외할머니가 어린 두 형제의 육아를 맡았다. 외할머니는 권위적인 사람으로 아이들을 엄하게 대했다. 외할머니가 아이들을 아프게 때릴 때면 여자는 “머리는 때리지 마세요.”라고 애원했다.

불우한 어린 시절

카뮈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고독과 병으로 얼룩져 있다. 어린 카뮈의 영혼은 절망과 비참에 빠질 수도 있는 환경이었지만, 알제의 태양과 바다가 주는 혜택 속에서 놀라운 긍정의 힘을 갖게 된다. 그를 구원으로 이끈 것은 알제리의 여름 대지,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람, 향일성의 식물들과 난만한 꽃들, 눈부시게 내려쬐는 햇빛과 바다였다.
“항구의 왼쪽, 유향나무와 금작화들 사이로 난 돌계단이 폐허로 인도한다. 길은 작은 등대 앞을 지나서 들의 한복판으로 빠져 들어간다. 벌써, 그 등대의 발치께에서는 보라색, 노란색, 붉은색 꽃들로 묵직해진 다육질의 식물들이, 요란한 입맞춤 소리를 내면서 바다가 핥아대는 첫 번째 바위 쪽으로 늘어뜨려진다. 가벼운 바람 속, 얼굴의 한쪽 뺨만을 덥혀주는 태양 아래서, 우리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빛을, 주름살 하나 없는 바다와, 그 빛나는 잇바디가 짓는 미소를 바라본다.”(『결혼』 중 「티파사에서의 결혼」)
카뮈는 알제의 강렬한 바다와 햇빛이 베푸는 감각의 향연 속에서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릴 줄 알았다. 그런 카뮈에게 가난 따위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이 주는 부(富)와 풍요 속에서 현실의 가난은 사치로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바다에서 자라 가난이 내게는 호사스러웠는데, 그 후 바다를 잃어버리자 모든 사치는 잿빛으로, 가난은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여름』 중 「티파사에서의 결혼」)
카뮈가 자신을 위대한 작가의 길로 이끈 두 선생을 만난 것은 우연한 행운이다. 지독한 불운의 세계에서 그가 만난 구원의 손길이다. 첫 번째 행운의 스승은 초등학교 2학년 담임교사였던 제르맹 루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외할머니는 가난한 집안을 도와야 된다고 카뮈가 더 이상 학교에 다니는 걸 완강하게 반대했다. 평소에도 카뮈에게 각별한 사랑을 쏟던 루이 선생은 그 외할머니의 고집을 꺾고서 카뮈가 중고등학교 장학생 선발시험을 치르도록 도와줬다. 카뮈는 루이 선생 덕분에 알제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수학하며 전차를 타고 통학을 했다. 카뮈는 명성이 높아지고 나이가 들어서도 늘 ‘내 귀여운 카뮈’라고 하는 루이 선생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뒤 수상기념 연설집을 스승에게 헌정한다.
그 시절 카뮈를 사로잡은 것은 축구였다. 카뮈는 고등학교 축구팀에서 활약하고, 나중에는 몽팡시에 스포츠회의 알제 팀에서 골키퍼로 활동했다. 그는 운동을 열심히 한 뒤 느끼는 나른한 피곤함과 더불어 기막힌 승리의 기쁨에 매혹당했다. 그는 경기에서 패배한 날 저녁에 맛보게 되는 울음이 곧 터져나올 것만 같은 슬픔과 어리석은 충동마저 사랑했다. 훗날 “인간의 도덕과 의무에 관해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축구를 통해 배웠다.”라고 쓸 정도였다.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카뮈는 여름방학에 알제 중심가에 있는 철물점 점원으로 선박회사의 사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벌었다. 카뮈가 만난 두 번째 행운의 스승은 철학자이자 에세이스트고 소설가였던 장 그르니에다. 철학교사 그르니에는 서른 두 살이고, 고등학생 카뮈는 열일곱 살이었다. 그 무렵 카뮈는 폐결핵으로 각혈을 하고, 학교를 쉬게 된다. 카뮈는 국가유공자의 자녀였기 때문에 무스타파 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다. 공동입원실에서 다른 환자들을 관찰하며 그것을 산문으로 썼다.
카뮈가 돌연 학업을 중단하자 그르니에는 한 학생을 앞세우고 벨쿠르의 빈빈가에 사는 제자를 찾아간다. 열일곱 살이던 청년 카뮈는 자신을 염려해서 찾아온 스승을 다소 무뚝뚝하게 대한다. 그르니에는 약간 당황하지만 이내 병들고 가난하며 아버지가 없는 청년의 자존심에 대해 이해한다. 나중에 “이미 그는 부서져 있었다. 그는 흙 속에서 빠져나와야 했으며, 그것은 생사의 문제였다.”라고 썼다.
이듬해 카뮈는 병에서 회복되자 이모부 집으로 옮겨 기거를 한다. 마침 이모부는 정육점을 하고 있어서 영양 섭취를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카뮈는 철학반 2학년 수업에 복귀해서 다시 그르니에를 만나고, 그의 격려 속에서 많은 양서들을 접하게 된다. 그를 문학의 길로 이끈 그르니에 선생과는 평생 동안 만나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유한다.

기사 이미지

카뮈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알제리는 지중해를 품고 있는 아프리카의 북부에 있다.
강렬한 태양이 사막과 바다를 달구어 특유의 풍광을 이루고 있다.

1933년, 카뮈는 건강상의 이유로 고등사범학교 입시 준비를 포기하고 알제 문과대학에 진학한다. 4월, 카뮈는 최초의 창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산문 「무어인의 집」을 썼다.
1934년 6월 16일, 알제의 유명한 안과 여의사의 딸인 시몬과 결혼을 한다. 시몬은 같은 학교에 다녔는데, 바람기 많은 모르핀 중독자로 알려져 있었다. 이모부가 결혼을 반대했기 때문에 카뮈는 그곳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카뮈에게 결혼 선물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흰 양말 한 다스요.” 카뮈가 어머니에게 요구한 결혼 선물은 그게 전부였다.
카뮈는 시몬의 마약 중독을 끊으려고 가진 애를 썼지만, 실패한다. 카뮈는 그르니에 선생의 권유로 공산당에 가입하고, 혼자 글을 쓰는 한편 생계수단으로 대학 기상대에 나가거나 자동차 부품을 팔기도 하고, 선박 중개회사와 도청의 자동차 면허증 및 등록증 교부 부서에서 일하기도 한다. 그리고 친구들과 ‘노동극단’을 창단하기도 했다.
1937년 5월 10일, 카뮈의 첫 책인 산문집 『안과 겉』이 샤를로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초판 부수는 겨우 350부였다. 여름에 마르세유를 거쳐 파리, 아비뇽, 피사, 피렌체 등지를 여행했다.

기사 이미지

미국판 『이방인』 초판본의 표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 나는 모른다.’

1940년 파리로 이주하여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고, 1945년부터 비밀리에 나오던 ‘콩바’(Combat) 지의 편집장으로 활약했다. 카뮈의 성격은 대체적으로 낙천적이었다. 그는 평소에는 짓궂고 장난기가 많았으며 익살스럽고 냉소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젊은 험프리 보가트처럼 아주 잘 생기고 삶에 대한 열정도 대단했다. 춤도 잘 추었고 대화를 재미있게 끌어가는 재주가 있었기 때문에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도덕주의자였고, 보수적으로 완강한 측면도 있었다.
1942년 2월에 폐결핵이 재발했고, 카뮈는 왼쪽 폐에 인공기흉을 달고 오른쪽 폐에는 8일마다 늑막에 공기를 주입하는 치료를 받았다. 5월19일. 『이방인』이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나왔다. 초판 부수는 4천4백부였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 나는 모른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경백(敬白).’ 그것으로는 아무런 뜻이 없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시작하는 『이방인』에 대한 처음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이전에 어떤 소설에서도 볼 수 없는 기이한 인물의 이야기였다. 어머니가 죽고 난 바로 그 이튿날 여자와 해수욕을 하고 부정한 관계를 맺고, 희극 영화를 보며 시시덕거렸다. 그는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 아랍인을 총으로 쏘았다. 사형집행을 기다리며 행복하다고 말했다.
카뮈는 “자기가 사는 사회에서 이방인이며, 사생활의 변두리에서 주변적인 인물로서 외롭고 관능적으로 살아가는” 뫼르소를 통해 인간의 부조리함을 드러내고자 했다. 카뮈는 첫 소설에 대한 서평을 보지 못했다. 출판사에서 부쳤다는 필자 증정본도 오랑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방인』이 얼마나 명석하고 훌륭한 작품인가를 사람들이 알아보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서 ’종전 후 최고 걸작‘이라고 칭송했다. 사르트르는 서평에서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어떠한 영웅적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한 인간”이라고 썼다.

카뮈가 사르트르를 만난 것은 1943년 6월이다. 사르트르의 희곡 「파리 떼」의 리허설에서 카뮈는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를 만난다. 처음엔 사르트르와 의기투합을 하고 사이가 좋았지만, 이내 두 사람의 관계는 금이 갔다. 1947년 『페스트』가 출간되고, 이 작품이 큰 성공을 거두자 카뮈는 인세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성공에는 불편도 함께 따라왔다. 수많은 편지들이 도착했고, 카뮈는 편지들을 읽고 답장을 써야만 했다. 스웨덴의 한림원이 1957년 노벨문학상을 안겨주었지만 그 무렵 카뮈는 파리의 지식사회에서 고립되어 있었고, 그의 처지는 마치 천덕꾸러기 ‘고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대다수 지식인들과 다른 정치적 행보를 하는 카뮈에게 등을 돌리고 비웃고 조롱했다.
카뮈는 노벨문학상 상금으로 루르마랭에 집을 마련하고 파리를 떠나 거기에 머물렀다. 온종일 구릉과 올리브나무와 사이프러스나무가 있는 들판을 쏘다니기도 했다. 한낮에는 불행조차 환하게 빛나게 하는 태양이 비치고, 저녁에는 포근했고, 밤에는 어두운 하늘에 별들이 가득했다. 그때 카뮈는 참으로 행복했다고 썼다. 우울과 불면과 의기소침 속에서 한동안 창작의 열정도 고갈된 채 삭막한 상태로 지내다가 루르마랭에서 소설에 대한 열정을 되찾았다. 그는 필생의 역작이 될 만한 소설에 매달렸는데, 그게 바로 「최초의 인간」이다. 그가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때 그의 가방에 초고 상태로 담겨 있던 원고였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그에게 더 이상의 작품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이 소설은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말미암아 미완으로 남았다. 이 소설은 카뮈가 사망한지 서른네 해가 지난 1994년에 비로소 출판되었다.

사업자 정보 표시
구름컴퍼니 | 이동헌 |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중동로 327 234동 1703호 | 사업자 등록번호 : 648-31-00015 | TEL : 010-9341-0353 | Mail : ldonghun@nate.com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7-경기부천-2097호 | 사이버몰의 이용약관 바로가기